아침부터 내내 평화로운 하루였다. 라이브라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매일 그래 왔듯 안개로 둘러싸인 도시 위를 날아 순찰을 돌고서도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리법칙이 바뀌는 경계점 근처만 제외하고 모두 훑어본 뒤에 이비는 경찰서 꼭대기에 앉아버렸다. 창문으로 들여다본 다니엘 로우 경부보조차 책상 앞에 앉아 묵은 서류들만 뒤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오기 전에 본 스티븐 씨의 모습도 딱 저랬다. 정말로. 이계와 이계의 범죄조직들, 초상인, 차원괴도는 물론이고 혈계의 권속도 잠잠한 하루란 소리였다. 그사이 연락이 왔는데 못 들은 것은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내 봤지만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헬사렘즈 롯이 웬일이래? 폭풍전야인 거 아냐? 즐거운 기분 이전에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 도시로 들어와 라이브라에 몸담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이에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의심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붕 떠버렸네..."
혹시나 싶어 스티븐 씨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돌아온 답장은 별도의 연락이 있기 전까진 편하게 대기해도 된단 내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이라도 잡아두는 건데. 이렇게 평일 한낮에 갑자기 놀자며 불러낼 만큼 한가한 친구는 없었다. 사무실에 가면 스티븐 씨와 보스인 크라우스가 있을 테지만 상사들이 있는 곳에서 휴식이 될 리 만무했고.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체스를 두고 있을 게 분명했다.
'레오는 알바 중이겠지? 제드는 공원에 갔을 테고, 체인은 술을 마시거나 인랑국 사람들과 만날 테고, 재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단은 애인인데, 어째 아침부터 메시지도 한 통 없고 코빼기도 못 봤다. 전날 술을 마시고 아직도 자고 있는 건지, 어디서 시비가 붙었는지, 도박을 하다 돈을 날리고 뒷골목에 나뒹굴고 있는지 무엇 하나 알 도리가 없었다.
'먼저 전화해볼까?'
전화하면 받기야 하겠지만, 괜히 그랬다 전화 너머로 낯선 여자 목소리라도 듣려온다면 지금의 제법 산뜻한 기분을 잡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바람 안 피움다. 이렇게 연애한다고 공개적으로 땅땅 박은 건 나도 처음이거든요?'라고 했던가, 기특한 소리지만 녀석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생각하면 영 신뢰가 가지 않는 소리였다. 솔직히 말만 듣고 바로 믿으면 그거야말로 호구가 아닐까? 말한 본인도 정말 믿어주리라곤 생각지 않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이비 본인도 그에게 일편단심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자신에 대한 호의만은 계속 안고 있길 바라는 게 욕심의 전부였다. 우스운 건, 그런 모든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재프에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지나치게 무른 짓이라는 걸 알아도 처음 한 번쯤은 속아줘도 괜찮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며 다리를 흔들고 있자니 신발 뒤꿈치가 회백색 건물 벽돌에 부딪혀 툭 툭 일정한 소리를 냈다. 흘끗거리며 올려다보는 행인이 없진 않았으나, 건물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여자의 모습에도 그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스쳐 지나갔다. 등 뒤로 붉은 날개가 뻗어있는 사람을 상대로 추락을 걱정할 필요도, 그 모습에 놀랄 필요도 없으니 당연했다. 이비는 헬사렘즈 롯의 이런 점이 좋았다. 굳이 남에게 자신을 숨기지도, 해명하거나 납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로 큰 장점이었다.
"됐다, 집에나 가야지."
더 생각하기도 슬슬 귀찮아졌다. 마침 밖에서부터 여유가 없어 읽는 걸 미뤄 온 책도 생각났고. 그렇게 행선지를 정하자마자 이비는 혈액으로 만들어진 날개를 펼치고 건물 위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집까지는 그리 많은 날갯짓이 필요치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탁기만 돌려놓고 책을 집어 들었다. 만에 하나 긴급 호출이 있을지도 모르니 휴대폰 벨소리만은 최대로 설정해두었다. 한적한 평일 낮의 거실은 창문으로 스민 햇빛을 받아 따뜻했고, 전부터 벼르고 있던 소설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몰입감을 뽐냈다. 이비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길게 엎드렸다. 높은 쿠션에 턱을 괸 자세로 책장을 팔랑 넘기자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과 어깨, 척추와 허리를 한꺼번에 망가뜨리는 자세라는 걸 알지만, 평소엔 이럴 여유조차 없었으니 잠시 사실을 외면하기로 했다. 몸을 덮은 담요를 어깨 위까지 따뜻하게 끌어올리자 만족감이 뭉실뭉실 피어올라 몸을 감쌌다. 머그잔의 밀크티는 길베르트 씨가 주시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맛있었고, 작게 틀어 둔 음악은 마침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한 여가시간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거실 창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님- 들어가도 됨까?" 라는 부름이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뭐야?"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역광을 받아 그림자 진 허연 것이 창밖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붉은 줄을 늘어뜨려 창밖에 매달린 채의 남자, 바로 평화를 무너뜨리러 온 재프 렌프로였다. 기가 막혀 보고 있자니 재프는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현관문을 통해 방문했었는데, 애 앞에서는 냉수도 함부로 못 마신다더니, 이비가 몇 번 창문으로 날아 집에 드나드는 것을 보더니 공참사로 벽을 타고 오기 시작할 모양이었다.
"들어와."
허탈하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대답하자 입 모양 만으로 허락임을 읽었는지 유리 너머의 재프가 히죽 웃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이비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직접 창문을 열어 줄 필요도 없이 좁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혈액이 잠금쇠를 풀어버렸다. 열린 창문으로 재프와 함께 짙은 시가 냄새가 뛰어 들어왔다. 이비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다행이라고 하긴 우습지만, 그 속에 낯선 향수 냄새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겠다고 해놓고 무심코 다른 여자를 만난 기색은 없나 살피는 본인에게 스스로 자존심이 좀 상했다.
"스타페이즈 씨가 오늘은 일 없다길래 혹시 하고 와봤는데, 기껏 한가로운 날에 책이나 보고 있슴까? 재미없게."
"넌 어디 굴러다니다 이제 나타났어? 담배 냄새 나니까 창문 닫지 말고 열어 둬."
그 말에 팔을 들어 스스로 냄새를 맡아 본 재프가 끄응, 소리를 내곤 다른 창문까지 활짝 열어두었다. 재킷도 벗어 대충 소파 등받이에 던져놓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비는 몸을 꾸물거리며 소파의 조금 더 안쪽으로 바짝 붙었다. 몸집이 작은 덕에 옆구리 쪽에 대충 앉을만한 자리가 나고, 재프는 사양 없이 엉덩이를 대충 걸쳐 앉았다. 소파가 기울어지는 무게를 느낀 이비가 길게 손을 뻗자 재프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에 닿은 은색 머리 위를 애정 어린 손길로 슬슬 쓸어주자 그 손을 잡아 내린 재프가 손바닥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뭐 하다 왔냐니까?"
"햄버거 사러 갔다가 귀찮게 시비가 붙는 바람에."
"아하~그래서 출근도 안하고 싸움질했구나? 싸워서 이긴 김에 쏠쏠하게 돈도 뜯었겠고? 그거 들고 도박하러 갔겠지?"
"아니, 누님 저 스토킹했슴까?"
"....."
했겠냐? 그런 의미를 담은 흐린 시선이 재프를 향했지만, 잡고 있던 손을 내려주곤 낯짝 두껍게도 헤죽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에 결국 또 한숨만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얼굴만 예쁘고 행실은 양아치인 연하를 만났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물론 몸도 좋긴 하다. 전투에 있어서는 천재적이라 멋지기도 하고. 하지만 단점을 꼽자면 끝도 없는 게 객관적 사실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콩깍지가 씌어도 사리 분별은 해야지. 이비가 재프를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되뇌이는 소리였다. 사귀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글렀을지도 모르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저 혈기념치는 애인에게 어디까지 휘둘릴지 상상도 하기 무서웠다.
"근데 누님, 진짜 책만 볼 거냐니까요."
"당연하지."
"나랑 놀아줘요...."
"....."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이비는 입을 다물고 무시했다. 몇번 더 칭얼거리던 재프는 이내 포기했는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푹 기대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고요 속에서 종이책이 넘어가는 작은 소리와 남은 밀크티를 멋대로 마시기 시작한 재프의 홀짝이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독서에 빠져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있던 이비는 소설의 전개가 늘어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재프의 입이 댓발은 튀어나와 있었다. 슬슬 인내심이 끝에 다다라 가는 것 같다는 본능적 직감이 들었다.
"재프."
"예?"
"연락은 왜 안 된 건데?"
"갑자기 묻는 게 그검까? 생각해보니 휴대폰을 어젯밤 사무실에 두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방금 들러서 찾아오는 길. 스타페이즈 씨도 오늘 일 없다며 그냥 보내줬고, 누님은 어디 있을까 고민하다가 집으로 와봤죠."
아니, 근데 진짜 재미없게 책만 보려고요? 작은 목소리와 함께 재프가 이비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따뜻하고 포곤한 섬유유연제와 밀크티의 향으로 감싸여 있던 공기가 또다시 흐트러졌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어질수록 등골을 타고 뜨끈하고도 날카로운 온기가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이비는 몸을 뒤척였다. 보고 있던 책장을 넘긴 뒤에야 그것이 재프의 손길임을 깨달았다.
"나 진짜 이런 날 아니면 책 볼 시간이 없어."
"그럼 그냥 보지 마요. 왜 안 하던 짓을 함까? 어차피 나 옆에 두면 내용은 눈에도 안 들어올 거면서."
"......."
불만 섞인 목소리에 정곡을 제대로 찔렸는지, 이비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페이지도 한참을 넘기지 못했다. 칫. 하는 소리를 낸 재프는 소파에서 내려와 아예 그 앞 바닥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아버렸다. 그는 상대가 어떤 행동과 분위기에 약한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어째 개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행동이지만, 고개를 내밀어 책을 쥔 애인의 손목에 코끝을 가져다 댄 것은 그래서였다. 곧게 뻗은 콧대가 톡톡 건드리자 손등에 힘이 들어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반응에 힘입은 재프는 손목에 동그랗게 도드라진 뼈 위로 가볍게 이를 세웠다. 옹기종기 모인 손가락들이 오므라드는 것을 보며 그는 대담함을 한층 더했다. 한 손으로 손목을 감싸 제가 물었던 부근을 검지로 슬슬 문지르고, 손목 안쪽을 간지럽히듯 쓸며 올라갔다. 한 줌에 들어올 듯 작고 둥근 어깨가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집중력은 날아간 지 오래면서, 고집을 부리듯 책에 고정되어 있던 이비의 시선이 드디어 페이지를 벗어났다. 기어이 한 손을 책에서 떼어내 손가락 마디를 깨물기 시작하던 재프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헤죽 웃었다.
"누님, 나 심심하다고요."
"너..."
"저랑 놀아요. 응? 책보다 훨씬 재미있게 해 줄게."
브레이크 없는 연하의 잔망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비는 정신을 바로잡고자 했다. 저건 귀엽게 치대는 강아지 같은 게 아니고, 갓 태어난 주먹만 한 솜뭉치도 아니다. 당장은 내가 우위에 있는 듯이 굴지만, 넘어가는 순간 맹수로 돌변하여 잡아먹히는 건 내가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비가 그렇게 생각해 손길을 떨치려는 순간 고개를 숙인 재프가 손바닥에 머리를 슬며시 부볐다. 보기보단 부드러운 하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게 스쳤다. 그게 이비에게는 꽤나 결정적이었다.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올려다보는 한껏 쳐진 눈꼬리가 지금만큼은 순하고 귀여워보였다.
'아, 미친. 귀여워.'
놓아버린 책이 결심과 함께 바닥에 팽개쳐졌다.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킨 이비의 두 팔이 재프의 목을 감아 세게 당겨 안았다. 불시에 숨통이 졸릴 정도로 안긴 재프의 입에서 켁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국 본인이 더 달려들 거면서 고집은 왜 부렸대요?"
재프는 툴툴거리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소파 위로 이비를 완전히 밀어 눕혔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팔을 감으며 이비는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네가 반칙만 안 했으면 이러지 않았어."
"반칙? 억울하네? 내가 뭘 했다고요."
"안달내고 졸랐잖아, 치사하게 귀여워가지고...."
웃음 섞인 소리를 내는 이비의 입술 위로 키스하던 재프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거렸다. 귀엽단 말은 싫은데, 그 때문에 받아줬다고 하니 뭐라 하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이없단 반응을 보이면서도 허리를 감아 안은 재프의 단단한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게 또 못내 귀여워서 이비는 그의 뺨을 감싸당겼다. 거듭 맞닿은 입술이 그새 더 뜨거워져 있었다. 아랫배 부근에 뭉근하게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감싸 올리는 재프의 손길대로 골반을 들어올렸다. 옷가지들이 하나씩 소파 아래로 툭툭 내던져졌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하루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고,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낼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